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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쉬아파", 이븐 알 알까미의 유령 - 1258년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반쉬아적 기억의 형성과 발전 중동/이슬람권

1. 핏빛으로 물든 티그리스 강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훌라구의 몽골군>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Baghdad_(1258)


1258년 2월 10일,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바스 칼리프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뒤이은 약탈과 학살(1262년 훌라구 자신이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약 20만 명), 한때 무슬림 세계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리던 바그다드의 몰락,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약 500년간 이어져오던 칼리프제가 비무슬림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된 사건은 동시대 무슬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몽골의 무슬림 세계 침략을 직접 경험한 페르시아의 시인 사아디(Sa'adi)는 당대 무슬림들이 경험한 충격을 다음과 같은 시로 전한다.

하늘은 마땅히 지상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리라
믿는 자들의 사령관, 무스타으심의 왕국이 종말을 고했으니

무함마드여! 종말의 날에 흙 속에서 다시 일어난다면
지금 사람들에게 내린 종말을 보시오

우리의 피눈물이 소맷자락을 적시는 동안
무자비한 자들이 문지방을 넘어 하렘의 사랑스러운 여성들을 취했다

슬프도다, 세상의 순환이여, 뒤집어진 일상이여
그 누구도 이렇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음이라

이제 보라, 그대 저 신성한 문의 영광을 보았던 자여
로마의 카이사르와 중국의 칸들은 이제 흙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구나

황제들이 엎드려 절하며 이마를 갖다댄 바로 그 곳에
이제는 예언자의 삼촌의 피가 흐른다

아, 그 순결한 피 위에 날아드는 파리에게는
심판의 날까지 꿀도 쓰게 느껴지리라

이제 이 세상 그 누구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리라
보석이 빠진 반지에는 타르만이 남아 있네

핏빛으로 변한 티그리스 강이 하류로 흘러가면
야자수 가득한 오아시스의 모래가 피 머금은 진흙으로 바뀌리라


원문 출처: سعدی، در زوال خلافت بنی‌عباس의 첫 9행
https://ganjoor.net/saadi/mavaez/marasi/sh6/

Carl Ernst의 영어번역본 출처: Nassima Neggaz, "The Falls of Baghdad in 1258 and 2003: A Study in Sunnī-Shī‘ī Clashing Memories" (PhD diss., Georgetown University, 2013), 118-119.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무슬림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바그다드와 압바스 칼리프조가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졌는가? 일찍이 무슬림 세계가 경험하지 못한 비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13세기에 처음 제기된 이 질문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무슬림 세계를 맴돌고 있다.

바그다드 함락은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의 머나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결코 오늘날의 아랍 무슬림들에게 완전히 잊혀진 사건이 아니다. 세계의 다른 민족 및 종교집단과 마찬가지로 아랍 무슬림들 역시 그들이 처한 배경과 환경에 따라 그리고 해석하는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따라 과거 사건을 바라보고 특정한 방향으로 해석해왔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특정한 해석과 기억은 다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특정한 시각을 형성한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에 대한 이해는 상호 강화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해석을 규정하며, 과거는 현재를 바라보고 설명하는 특정한 시각을 형성한다.

지난 12월 3일 허핑턴포스트 아랍어판에 실린 이집트 저술가인 왈리드 알리 살림(Walid 'Ali Salim)의 "움마의 파괴자들(هادمو الأمم, hādimū al-umam)"이라는 글은 어떻게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의 기억이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동원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 무슬림들이 처한 상황이 과거 사건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의 원인이 몽골군의 힘 또는 압바스 조의 약화가 아닌 압바스 조 내부의 배신자, 즉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al-Must‘ṣim)의 재상인 이븐 알 알까미(Ibn al-‘Alqamī)의 배신으로 돌린다. 살림은 14세기에 활동한 역사가인 앗 수브키(al-Subkī)의 기록을 인용, 이븐 알 알까미는 몽골이 침공하기 전부터 권력을 잡을 기회를 엿보며 흑심을 품고 있었고, 훌라구가 침공을 개시하자 그와 비밀리에 내통, 칼리프를 속이고 바그다드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수브키에 따르면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포위하자, 이븐 알 알까미는 칼리프에게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거나 칼리프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과거 셀주크의 술탄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칼리프가 몽골의 지배권을 인정할 것을 바라며, 훌라구의 딸과 칼리프의 아들을 혼인시키길 원한다고 속인다. 이븐 알 알까미는 칼리프 및 장군들, 법관들과 바그다드의 명사들을 속여 그들이 자진해서 훌라구의 천막으로 가지만 결국 모두 몽골군에 의해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이븐 알 알까미와 훌라구의 측근으로 활동하던 쉬아파(이스마일파)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인 나시르 앗 딘 투시(Nāṣir al-Dīn al-Ṭūsī)는 훌라구를 설득해 칼리프를 처형하게끔 한다. 수브키는 예언자 무함마드 가문의 일원의 피를 흘리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말을 두려워한 훌라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도록 칼리프를 카펫에 싸서 때려죽였다고 전한다. 칼리프가 죽은 뒤, 몽골군은 30일 동안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9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훌라구는 라마단 금식을 금지하고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와 술을 강제로 먹게 만들며 아잔을 금지하고 모스크에 술을 뿌리는 등 이슬람을 모욕했으며, 기독교도들을 요직에 임용했다고 수브키는 기록한다. 한편 바그다드의 권력을 잡기 위해 배신한 이븐 알 알까미는 훌라구에 의해 배신당했고 결국 살해당했다고 전한다.

살림은 이븐 알 알까미와 같은 배신자에 의한 무슬림 공동체("움마")의 약화와 패배가 결코 먼 과거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 시대"의 일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븐 알 알까미와 같이 흑심과 악의를 숨기고 있는 자들이 여전히 아랍 무슬림 국가들을 장악하고 있으며 무슬림 공동체를 나락으로 밀어넣기 위한 책략을 계속해서 꾸미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글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

"(이븐 알 알까미와 같은) 재상들과 그들의 숨은 악의가 없었다면 어떤 악도 이슬람 세계에 침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슬람 세계가 겪은) 많은 재앙들의 원인이 그러한 자들의 조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 역시 그런 역사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악의를 숨기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는 국가를 무너뜨렸고, 나머지 역시 (무슬림 국가들을) 나락으로 밀어넣기 위한 책략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만약 무슬림 공동체가 무지에서 깨어나서 이 문제를 긴급히 처리하지 않는다면 과거보다 더욱 파괴적인 몰락이 뒤따를 것이다. 많은 무슬림 국가에서 배신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이는 비밀리에 숨어 음모를 꾸미는 자들과 그런 음모로 득을 볼 사람들이 아닌 모든 자들이 부정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다. 무슬림 공동체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침투하여 약화시킨 악의를 품은 자들을 밝혀내야만 한다.
"

이처럼 살림은 내부 배신자의 음모에 의한 바그다드의 함락, 그리고 무슬림들의 안달루시아 지배를 크게 약화시킨 1212년의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 전투의 패배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에서 오늘날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가 처한 위기의 원인을 진단해낸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13세기에나 21세기에나 무슬림 공동체의 약화와 패배, 치욕의 궁극적 원인은 공동체에 몰래 숨어들어 책략을 꾸미는 내부의 배신자들의 배신과 음모 때문이다.

2. "배신자"의 등장

14세기 역사가인 앗 수브키의 기록을 인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살림의 해석은 무슬림 세계, 특히 순니 무슬림들 사이에서 결코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아래서 살펴보겠지만, 그가 전하는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이야기는 13세기부터 15세기 무슬림 역사가들이 발전시키고 추가해온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다양한 일화들을 한데 결합한 것이다.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무슬림들의 기억과 해석의 변화와 차이를 연구한 나시마 낫자즈(Nassima Neggaz)의 연구(Neggaz 2013)가 보여주듯이, 재상 이븐 알 알까미라는 배신자에게 함락의 책임을 온전히 지우는 해석은 이미 바그다드가 함락된 바로 직후인 13세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무슬림 세계의 약화와 패배, 치욕의 원인을 단순히 한 개인에게만 지우는 것을 넘어서는 중요성을 지닌다.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이러한 해석과 기억은 순니파의 쉬아파에 대한 비난, 즉 쉬아파가 무슬림 공동체 내부의 잠재적 배신자이자 적이라는 비난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전해왔고 이용되어 왔다.

왜냐하면 훌라구와 결탁하여 칼리프를 배신한 재상 이븐 알 알까미는 바로 쉬아파였기 때문이다.

낫자즈가 검토한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가장 초기 기록들, 즉 13세기 중, 후반의 기록들은 저자의 종파와 어떤 왕조 밑에서 일했는지와 같은 개인적 배경과 정체성에 따라 함락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전한다. 쉬아파 재상인 이븐 알 알까미가 훌라구와 결탁하여 압바스 칼리프조와 바그다드를 무너뜨렸다는 해석은 델리 술탄국의 관료로 일하며 몽골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 알 주즈자니(al-Jūjzānī, 1193-1263), 바그다드에서 태어나 압바스 칼리프조 밑에서 관료를 지냈던 이븐 앗 사이(Ibn al-Sā‘ī, 1196-1276)와 같은 순니파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알 주즈자니에 따르면,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 몇 년 전인 1256년 바그다드의 쉬아파 구역인 알 카르크(al-Karkh) 지역에서 순니파와 쉬아파 사이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칼리프 알 무으타으심은 순니파의 편을 들어 쉬아파를 박해했고, 이븐 알 알까미는 이에 앙심을 품고 복수하기 위해 몽골에게 바그다드와 칼리프를 넘겼다.

한편 이븐 앗 사이 역시 알 주즈자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하며, 더 나아가 이븐 알 알까미가 "라피디(rāfiḍī, '정통 칼리프를 부정(rāfḍ)하는 자'라는 의미로 쉬아파에 대한 멸칭)"였기 때문에 배신했다고 주장한다. 위의 허핑턴포스트 아랍어판 기사에서 본 이야기들, 즉 훌라구는 점령이 아닌 자신의 딸을 칼리프의 아들과 결혼시키길 원한다고 칼리프를 속여 그를 훌라구의 천막으로 자진해서 가게 만든 이야기와 칼리프가 자루에 갇힌 채 맞아죽었다는 이야기 역시 이븐 앗 사이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한편 동시대의 다른 역사가들, 즉 나시르 앗 딘 앗 투시(Nāṣir al-Dīn al-Ṭūsī, 1201-1274)와 같은 쉬아파, 이븐 알 이브리(Ibn al-Ibrī, 1226-1286)와 같은 기독교도 및 훌라구가 세운 일칸국의 순니 무슬림 관료로 일칸국 몽골인들의 시각을 반영한 역사서를 저술한 라쉬드 앗 딘(Rashīd al-Dīn, 1247-1318)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알 주즈자니와 이븐 앗 사이와 같은 순니 역사가들과는 다르게, 이들 기록에서 쉬아파 재상 이븐 알 알까미는 배신자가 아닌 직면한 몽골의 위협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칼리프의 무능함과 고집, 그리고 재상을 시기해오던 순니파 관료들 때문에 좌절한 비운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들 기록에서 바그다드 함락의 책임은 재상 이븐 알 알까미가 아닌 충심 어린 현명한 조언을 무시한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과 순니파 관료 및 측근들에게 있다. 또한 몽골을 '이슬람의 적', '야만인' 등으로 묘사한 알 주즈자니나 이븐 앗 사이와 달리, 이들의 기록에서 훌라구는 타락하고 부패한 압바스 칼리프조를 심판하기 위한 신의 징벌의 화신으로 묘사되며, 칼리프의 어리석음과 탐욕, 무능함을 꾸짖는 긍정적인(적어도 중립적) 인물로 그려진다.


<훌라구: 피에 미친 학살자 또는 체화된 신의 징벌>
https://en.wikipedia.org/wiki/Hulagu_Khan#/media/File:Hulagu_Khan.jpg


앗 투시의 기록(그가 직접 남긴 기록이 아닌, 아타 말리크 주베이니(‘Aṭā Malik Juwaynī, 1226-1283)의 기록에 인용된)은 훌라구의 바그다드 점령이 배신이 아닌,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삽입된 칼리프와 훌라구 사이의 유명한 대화가 전해진다.

"먹어라."
칼리프는 대답한다. "하지만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훌라구가 받아친다. "그렇다면 왜 이것들을 가지고 있던 것이냐?
왜 이 금들을 병사에게 주지 않았더냐?
왜 궁전의 철문을 녹여 화살촉을 만들지 않았고 짐이 강을 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던 것이냐?"
칼리프는 다시 대답한다. "그것은 신의 뜻이었습니다.
"(Neggaz, 169)


이와 비슷한 대화는 라쉬드 앗 딘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라쉬드 앗 딘은 또한 훌라구가 바그다드로 진격하기 전 코란 구절을 인용하여 칼리프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한을 보냈다는 이야기 또한 전한다. 이처럼 비 순니파, 또는 친 몽골측 사료의 기록에서는 몽골과 훌라구는 피에 굶주린 불신자 야만인 집단이 아닌 무능하고 부패한 칼리프와 대비되는, 신의 뜻을 실천에 옮긴 경건하고 현명한 지배자로 그려진다.

초기 기록에 드러나는 이러한 현저한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븐 알 알까미는 정말 바그다드를 팔아넘긴 배신자일까, 아니면 직면한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주군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헌신했지만 좌절한 비운의 영웅일까? 낫자즈가 지적하듯이, 이들 초기 기록은 실제 바그다드 함락 당시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 아닌 저술가 개인의 개인적 경험과 환경, 정체성과 위치를 반영하여 몽골 지배 질서의 정당성의 부정이나 옹호, 쉬아파에 대한 변호 또는 비난과 같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구성된 이야기로 해석되어야 한다(ibid., 138-140). 더 나아가 그녀는 13세기 무슬림 역사가들의 바그다드 함락 기록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들, 즉 종파 집단 사이의 갈등, 무능하고 부패한 통치자, 궁중 암투, 내부 배신으로 인한 도시와 국가의 멸망, 쉬아파 재상에 대한 비난 등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기보다는 특정한 메시지(특정한 통치체제에 대한 비난 또는 정당성 강화, 도덕적 교훈 등)를 전달하기 위해 무슬림 역사가들이 전통적으로 애용해온 창작 주제(topoi)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ibid., 204). 즉 이븐 알 알까미 이야기는 정말로 그가 훌라구와 내통하여 압바스 조를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중세 무슬림 세계의 순니파 역사가들이 지녔던 쉬아파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보여준다.

3. 배신자에서 배신자들로: 이븐 알 알까미에서 쉬아파로

바그다드 함락 직후 구성된 함락 과정과 그 책임에 대한 상반된 두 경향의 이야기는 몽골 지배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시리아와 이집트의 순니파 맘루크 조와 대립하던 14세기에도 이어지며 발전한다. 앞선 시대 등장했던 종파주의적이고 반쉬아파적인 서술은 이 시기 들어 더욱 극명해진다. 이는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환경의 결과로, 14세기 일칸국과 맘루크 사이의 대립이 지속됨에 따라 맘루크 관료로 봉직하던 역사가들은 맘루크 지배체제의 종교적 정통성을 옹호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칸국의 통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앞선 시대에 등장한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서사와 해석을 유지, 발전시켜나갔다. 이들의 목적은 진정한 신앙의 수호자인 맘루크 조와 달리, 일칸국은 무슬림 세계 내부의 배신자인 쉬아파의 배신 덕분에 바그다드를 점령할 수 있던 침략자일뿐이라는 점을 역사를 통해 입증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일칸국 군주들의 쉬아파에 대한 후원과 보호(특히 울제이투 칸은 아예 쉬아파로 개종하기에 이른다.) 아래 쉬아파의 영향력이 강화됨에 따라, 이를 인식하고 이에 맞서는 순니파 집단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하려는 순니 역사가들과 법학자들은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반쉬아적인 순니 해석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한편 몽골 지배질서를 인정하고 그 밑에서 살아가던 쉬아 무슬림 역시 맘루크 치하 순니파들의 '역사전쟁'에 맞서 13세기의 친쉬아/친몽골적 서사를 이어나갔다. 대표적으로 이라크의 쉬아파 학자인 이븐 앗 티끄타까(Ibn al-Ṭiqṭaqā’, 1262-1310)는 앞선 시대의 앗 투시, 이븐 알 이브리 및 라쉬드 앗 딘의 기록을 주로 참고하여 이븐 알 알까미를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인물로 순니 역사가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오히려 칼리프와 그의 순니 측근들의 시기에 시달리고 고통받았던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앞선 시대의 친쉬아/친몽골적 저자들과 비슷하게 그의 기록에서 함락의 책임은 무능한 칼리프와 그의 순니파 측근들에게 있다.

반면 맘루크 하의 순니 역사가들, 즉 앗 다하비(Al-Dhahabī, 1274-1348), 이븐 카씨르(Ibn Kathīr, 1301-1373), 앗 사파디(Al-Ṣafadī, 1296-1363), 알 쿠투비(Al-Kutubī, 1287-1363), 알 마끄리지(Al-Maqrīzī, 1364-1442), 이븐 앗 타그리비르디(Ibn al-Taghrībirdī, 1410-1477) 등은 모두 바그다드 함락의 책임을 재상 이븐 알 아까미의 배신과 음모에 돌리며 앞선 시대의 반쉬아적인 해석을 계승한 동시에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추가함으로써 반쉬아적인 메시지를 더욱 확실히 전달하고자 했다. 앗 다하비는 이븐 알 알까미가 모스크에서의 설교와 예배를 막으려 했다고 전하며 그가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였음을 강조하고자 했고, 이븐 카씨르는 이븐 알 알까미의 음모가 카르크 사건에 대한 보복보다 더욱 압바스 조 및 순니파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 즉 순니파를 제거하고 쉬아 파티마 조를 재건하려는 뜻에서 기인했다고 해석한다. 15세기의 알 마끄리지 이븐 카씨르와 마찬가지로 재상의 순니파와 압바스 조에 대한 적의와 증오가 1256년의 카르크 사건이 아닌 그가 압바스 조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키워온 더욱 뿌리 깊은 것이었다고 서술한다. 이븐 알 알까미와 나시르 앗 딘 앗 투시가 훌라구에게 피를 흘리지 않고 칼리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일화도 이븐 카씨르가 최초로 언급한다. 앗 사파디와 알 쿠투비는 도덕적 교훈을 위한 새로운 이야기, 즉 재상이 몽골에 의해 배신당한 뒤 그의 배신을 후회했으며 결국 배신의 대가를 치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앞서 살펴본 재상의 거짓말, 즉 훌라구의 목표가 셀주크 술탄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며 칼리프를 속인 재상의 이야기는 이븐 앗 타그리비르디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한편 이러한 순니 역사가들의 해석은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ya, 1263-1328)를 필두로 한 맘루크 시대의 순니 울라마들에 의해 크게 변화한다.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들이 제시한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까지 순니 종파주의자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쉬아파를 바라보고 비난하는 핵심적 근거를 형성했다.

순니 역사가들이 바그다드 함락의 책임을 쉬아파 재상 개인의 배신에 두었다면, 이븐 타이미야의 비난은 재상 이븐 알 알까미보다는 앞선 기록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던, 훌라구의 자문관 중 하나인 쉬아파 천문학자 나시르 앗 딘 앗 투시를 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더 이상 재상이든 앗 투시든 한 개인의 배신이 아닌, '쉬아파 집단 전체'의 배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래는 쉬아파의 교리를 반박하고 비난하는 그의 책, "예언자의 순나의 방법론(Minhāj al-Sunnah an-Nabawīyyāh)"의 인용이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들이 침략해올 때, 그들(쉬아파)이 항상 무슬림에 맞서 비무슬림 침략자들의 편을 들어왔음을 보았다. 몽골의 왕, 칭기즈 칸이 일어났을 때 라피다(Rāfiḍa, 쉬아파들)들은 그의 편을 들었다. 칭기즈 칸의 아들인 훌라구가 호라산과 이라크와 샴을 침략했을 때에도 라피다들은 그의 편을 들었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례들이다. 그들은 호라산과 이라크에서 몽골의 공공연한 또는 은밀한 최대 협력자들이었으며, 이븐 알 알까미라는 바그다드의 재상은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칼리프와 무슬림들을 속이고 병력을 감축하고 약화시켰으며 몽골 점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러 술책을 부렸다(Neggaz, 331에서 재인용)."

이븐 타이미야는 바그다드 함락과 쉬아파의 배신을 사례로 들며 무슬림(정확히는 순니 무슬림) 공동체가 외부의 위협과 침략에 직면했을 때 항상 쉬아파들이 외부 침략자와 협력하여 내부에서 배신해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이븐 타이미야에게 바그다드 함락은 재상 또는 천문학자 개인의 배신의 결과가 아닌, 쉬아파 집단 전체의 배신의 결과다.

낫자즈는 이븐 타이미야의 쉬아파 집단 전체에 대한 비난의 이유로 그가 활동했던 14세기 초 중동의 종파 사이의 권력 관계의 변화를 제시한다. 그가 "예언자의 순나의 방법론"을 집필한 시기인 1310-1313년 경, 일칸국의 군주인 울제이투는 쉬아파로의 개종을 선언했고(1310년), 쉬아파 성직자들과 법학자들에 대한 후원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이에 따라 나시르 앗 딘 앗 투시와 같은 쉬아 학자들의 영향력과 그들의 이념 역시 더욱 널리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더 나아가 무슬림으로 개종한 울제이투는 스스로 "이슬람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고자 했고 메카와 메디나의 성지를 점령하고자 하는 등 종교적 정통성까지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이러한 이념적, 정치적 도전에 위기감을 느낀 순니 법학자로서 이븐 타이미야는 쉬아파와 구분되는 순니파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고히 세우는 동시에 몽골과 쉬아파 모두를 '비무슬림/불신자'로 비난할 수 있는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는 것이 낫자즈의 분석이다(Neggaz, 332-334).

이븐 타이미야의 쉬아파 전체를 향한 비난과 적의라는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그의 제자들에게로 계승된다. 알 자우지야(al-Jawziyyah, 1292-1350)는 나시르 앗 딘 앗 투시를 "다신론과 불신앙의 보호자, 이단자"로 묘사하고 훌라구와 손을 잡음으로써 "예언자와 예언자의 종교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복수를 수행했다."(Neggaz 336-337)고 비난한다. 위에서 살펴본 왈리드 알리 살림의 글에도 인용된 앗 수부키(al-Subkī, 1284-1355) 역시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로 그의 바그다드 함락에 대한 해석 역시 이븐 타이미야의 해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들은 이븐 알 알까미 개인을 넘어 쉬아파라는 집단 전체가 무슬림이 아닌 불신자들, 순니 무슬림 공동체로 침투한 적들, 언제든지 순니 무슬림과 이슬람을 배신하고 위협에 빠뜨릴 잠재적 배신자로 그러냈으며, 이들의 해석은 바그다드 함락을 쉬아파의 배신과 숨겨진 악의를 상징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 해석은 오늘날까지 순니 무슬림들, 적어도 일부의 순니 종파주의자들의 이슬람 역사에 대한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4. 이븐 알 알까미의 후손들, 그리고 이븐 타이미야의 후손들

2003년 4월 29일,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은둔하며 도망다니던 사담 후세인은 "위대한 이라크 국민과 아랍 및 이슬람 국가의 국민들, 그리고 세계 모든 곳의 고귀한 이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는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훌라구가 바그다드에 입성했듯이, 범죄자 부시 역시 알까미와 함께 바그다드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까미가 한 사람이 아니다."

사담 후세인을 포함,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경험한 많은 순니 무슬림들은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점령을 떠올렸다. 두 점령 모두 "불신자" 침략자에 의해 이루어졌고, 압바스 칼리프/이라크군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졌으며, 그리고 순니파가 보기에, 두 번 모두 쉬아파들은 침략자들과 협력하여 압바스 칼리프와 이라크를 배신했다. 이븐 타이미야와 그 제자들이 제시한 "무슬림 내부의 배신자, 쉬아파"라는 기억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영국 태생 무슬림으로 호주에서 활동하는 아미르 버틀러(Amir Butler)는 2004년 5월 12일 Antiwar.com에 기고한 글에서 13세기의 몽골 침략과 2003년의 미국 침략을 그리고 압바스 조를 배신한 이븐 알 알까미와 이라크 임시정부인 이라크 통치위원회(Iraqi Governing Council)의 대표를 지낸 쉬아파 망명 정치인인 아흐마드 찰라비(Ahmad Chalabi)를 동일시했다.

물론 2003년 이전에도, "쉬아파의 배신과 바그다드의 함락"이라는 기억은 쉬아파의 영향력 강화를 위협으로 인식한 순니 종파주의자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성직자들에 의해 애용된 소재였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발발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성직자들은 이슬람 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건 혁명의 파급력을 우려했다. 혁명 직후인 1979년 "그리고 마주스(조로아스터교도, 이란인에 대한 멸칭)의 차례가 왔다(Wa Jā’a Dawr al-Majūs)"라는 책을 쓴 압둘라 무함마드 알 가립(‘Abd Allāh Muḥammad al-Gharīb)과 같이, 이들은 이란 혁명을 '이슬람 혁명'이 아닌 '이단적 종교인 쉬아파의 혁명이자 순니 이슬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쉬아파와 구분되는 순니 정체성을 확립하고 순니파와 쉬아파를 구분함으로써 이란 혁명의 영향력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한번 1258년의 기억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1258년의 기억이 본격적으로 순니 무슬림들의 역사적 기억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만든 핵심 촉매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었다. 두 사건이 지닌 뚜렷한 유사성(외부의 불신자 침략자,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압바스 칼리프조와 사담 후세인 정권, 그리고 쉬아파의 역할)으로 인해, 순니 종파주의자들은 1258년의 기억을 다시금 동원하여 2003년의 정권교체를 과거와 같은 '쉬아파의 배신'으로 규정함으로써 아랍/이라크 순니파들을 결집하고 자신들의 영향력과 발언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3년 11월 이마드 알리 압두 앗 사미 후세인(‘Imād ‘Alī ‘Abdu al-Sāmī Ḥusain)이 공개한 "쉬아파의 배신과 무슬림 공동체의 패배에의 영향(Khiyyānat al-Shī‘a wa Atharuha fī Hazā’im al-Umma al-Islāmiyya)"이라는 책은 1258년의 함락과 2003년의 패배를 동일시한 최초의 기록이다. 더 나아가 과거의 "라피다"라는 용어 대신 쉬아파를 지칭하는 새로운 멸칭, "알 알아끼마(al-'Alāqima)이 등장했고 이라크를 넘어 순니 세계의 여러 성직자들과 작가들이 1258년의 역사적 "선례"를 토대로 쉬아파의 배신적 본성과 순니 무슬림에 대한 적의의 역사를 끌어와 현대의 쉬아파들을 비난했다.

사우디 성직자인 무함마드 알 아리피(Muḥammad al-‘Arīfī)는 2009년 12월 11일 설교에서 "쉬아파는 항상 순니파를 노리며 덫을 설치해왔다. 656년(1258년), 그들은 몽골과 타타르와 협력했고, 이븐 알 알까미와 쉬아파들은 훌라구를 도와 순니파를 살해했다. 우리는 역사 전체에 걸친 그들의 배신을 잊어선 안된다."라고 말했다. 2012년 유투브에 게시된 맘두흐 알 하르비(Mamdūḥ al-Ḥarbī)의 설교 음성파일인 "세계 속의 쉬아파라는 문어(al-Ikhṭabūṭ al-Shī‘ī fī al-‘ālam)", 2013년 5월 24일 쿠웨이트 신문인 알 와딴(al-Waṭan)에 실린 우사마 알 까흐따니(Usāmah al-Qaḥṭānī)의 "작은 훌라구와 샴 지역의 '알라끼마화(쉬아화) (Hūlākū al-aṣghar wa ‘Alāqimat al-Shām)" 등은 모두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된 역사적 기억과 해석을 통해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쉬아파의 영향력 강화로 인한 중동 지역의 종파 관계의 변화를 바라보는 특정한 시각을 구성하고자 하는 순니 종파주의자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라크에서 활동한 순니파 테러리스트들 역시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받고 적극적으로 1258년의 기억을 이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아부 무스압 알 자르카위(Abū Muṣ‘ab al-Zarqāwī)로, 그는 두 차례의 장문의 설교, 즉 2005년 공개된 "그리고 이븐 알 알까미의 자손들이 돌아왔다(Wa ‘ādā aḥfād ibn al-‘Alqamī)" 2006년 공개된 "라피다들의 말이 당신에게 도달했는가?(Hal ‘atāka ḥadīth al-rāfiḍah)"에서 1258년 사건에 대한 순니 종파주의적 기억, 즉 이슬람에 대한 쉬아파의 배신과 적대를 순니파 내의 잠재적 지지세력에게 일깨우고자 했다.


IS의 프로파간다 잡지, 다비끄 13호 - 표지부터 드러내놓고 쉬아파 비난>/clarionproject.org/wp-content/uploads/Issue-13-the-rafidah.pdf" target="_blank">"다비끄(Dabiq)" 13호에서 인용됨으로써 다시 나타난다.

5. 중동을 배회하는 유령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과 압바스 칼리프 조의 파멸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목도한 무슬림들은 역사상 유례없던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처한 정치적 입장, 개인적 정체성과 세계관에 따른 다양한 해석을 제시했다. 재상 이븐 알 알까미라는 개인의 배신을 강조하던 13세기 중반의 순니파 반몽골 역사가들의 해석은 14세기 맘루크 조와 일칸국 사이의 대립 첨예화, 쉬아파의 영향력 강화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이븐 타이미야와 같은 배타적 순니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인물들에 의해 더욱 노골적인 반쉬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산은 여전히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중동 내의 이란의 영향력 강화에 따른 쉬아파의 부상을 순니 이슬람과 순니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와하비 성직자들과 순니 극단주의자들과 같은 집단은 13세기부터 형성되어 이븐 타이미야를 거쳐 발전해온 1258년의 바그다드 함락 사건에 대한 특정한 기억을 적극적으로 동원, 현재를 바라보는 특정한 세계관을 구성했다.

오늘날 중동의 종파주의는 순니와 쉬아라는 두 종파가 형성되던 7-8세기부터 지금까지 불변한 상태로 내려오는 끝없는 갈등도, 동시에 2003년 이후 미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외부 행위자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구성물도 아니다. 순니와 쉬아 두 집단 사이의 역사적 기억의 차이, 정체성의 차이, 상대에 대한 타자의 인식 자체는 항상 존재해왔다. 그러나 1,300년에 걸친 이슬람의 역사상, 종파 정체성의 차이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갈등이 폭발한 적은 없었다. 종파 갈등은 정치 권력 관계의 변화, 사회 내의 질서의 변화와 같은 외부적 환경의 변화에 뒤따르는 현상이지, 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2003년 미국에 의한 바쓰 정권의 붕괴는 순니와 쉬아 두 종파 집단 내의 종파주의적 행위자들에게 이미 이라크 및 중동 세계에 존재해오던 역사적 기억의 차이와 타자에 대한 인식을 동원하고 이용하여 실제 폭력과 갈등, 적의로 변환할 기회를 제공했을 뿐, 원래는 존재하지 않던 순니파와 쉬아파 사이의 상호 적대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종파주의적 행위자들에게 종파갈등을 위해 동원할 상징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무기는 이미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그러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의 종파주의적 세계관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실제 지지로 바뀔 수 있는 환경이었다. 2003년 이후 중동 정세는 그들에게 그러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지금, 하나의 유령이 중동을 떠돌고 있다. 이븐 알 알까미라는 유령이.


참고문헌

Nassima Neggaz. The Falls of Baghdad in 1258 and 2003: A Study in Sunnī-Shī‘ī Clashing Memories. PhD diss., Georgetown University, 2013.

Nibras Kazimi. "Zarqawi’s Anti-Shi’a Legacy: Original or Borrowed?" Current Trends in Islamist Ideology 4(2006): 5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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