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짓을 하는가 - 변명과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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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박물관들(2) - 이슬람 1,400년의 부재 요르단

요르단의 박물관들(1) - 우리는 베두윈의 후예

요르단은 인구의 절대 다수가 아랍인이고, 순니 무슬림인 국가입니다. 기독교도 등 비무슬림은 굉장히 소수이고, 19세기 말 요르단 지역으로 이주해온 체르케스인 등 카프카스 투르크계 민족의 후손들도 아직 살고 있지만 요르단 국민의 민족적, 종교적 구성은 이라크나 시리아, 레바논 및 팔레스타인과 같은 인근 국가에 비해서, 그리고 꽤 큰 규모의 콥트 기독교 공동체가 있는 이집트에 비해서도 매우 동질적인 편입니다.

이슬람 없는 박물관

하지만 요르단이 아랍-무슬림 다수 국가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요르단에 와서 오직 박물관만을 돌아다녔다고 할 때, 이 방문자는 적어도 박물관 관람을 통해서는 요르단이 아랍-무슬림 국가임을 알아차리기 매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던 민속박물관에서 베두윈의 풍습과 생활양식에 대한 전시를 보았다면, 그리고 이 방문객은 요르단이 베두윈 사회라는 인식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요르단 내 대부분의 박물관 전시에서 요르단이 무슬림 다수 국가임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요르단의 박물관들은 7세기 이슬람이 요르단에 전파된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수도 암만에서 제가 다닌 박물관들 - 로마 극장 내의 민속전통 박물관 및 민속박물관, 요르단 국립박물관, 시타델 내의 고고학박물관 - 에서, 이슬람 전파 이후 시대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박물관은 딱 한 곳 있습니다. 시타델 내의 고고학박물관이지요.


암만 시타델과 암만 전경 - 파노라마 사진
카이로 시타델처럼 진짜 성채가 남아있는 곳인줄 알았는데, 직접 가보니 폐허만 이렇게 있습니다.



암만 시타델 내에 있는 고고학박물관


소규모인 고고학박물관은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로마와 비잔틴 시대부터 이슬람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는 박물관입니다. 작은 규모에 비해 1만년이 넘는 시대를 다루다보니 사실 전시 규모는 굉장히 소박합니다. 비록 작은 박물관이지만 신석기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요르단 지역 내에서 출토된 고고학 유물들과 함께 당시 요르단 지역에 어떤 문명이 존재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구비된 곳입니다. 나중에 이집트의 박물관과 비교해서 같이 보겠지만, 모든 전시물과 전시실에 영어-아랍어로 설명이 병기된 요르단의 박물관은 이집트의 박물관들에 비해 관람객에게 더욱 친절한 장소입니다.


고고학박물관 내부

보시다시피 그리 크지 않습니다.


더 잘 나온 사진

출처: http://www.travel-tour-guide.com/jordan_trip_photos/3_trip_mount_nebo_pictures_kerak_castle_st_george_church_mosaic_amman_day_tour.htm




비록 많지는 않더라도 전시물들에는 적어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느 시기의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박물관은 암만 내에서 제가 찾은 박물관들 중 유일하게 이슬람 이후 시대에 대해 할애한 전시실이 있는 박물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박물관에서는 661년 요르단의 이슬람 전파 이후 1916년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이끈 아랍 봉기 이전 약 1,400년의 이슬람 이후 시기를 단 하나의 전시실에서만 다룬다는 점입니다.


1,400년이 단 한 방에


박물관 자체가 소규모기에 이슬람 이전 비잔틴이나 로마, 철기시대에 대해서도 그리 많은 공간이 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이전 시대에 대해서는 역시 암만 시내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에서 더욱 크고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슬람 이후 역사에 대한 전시는 오직 이 곳에만 전시하고, 다른 말로 하자면 암만 시내 주요 박물관들을 통틀어서 이슬람 이후에 대한 전시는 7세기부터 20세기까지를 한 공간에 모아놓은 저 전시실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가보지 못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 박물관이지요.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박물관은 이슬람 전파 이후 요르단의 역사에 대한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소유물 등에 대한 전시에 집중된 곳이며, 암만 시 외곽에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저도 지금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쉽게 갈 엄두가 나지 않네요. 흔히 말하는 1,400년 이슬람 문명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는 박물관은 암만 시내, 적어도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이자 접근성이 용이한 암만 다운타운(와사뜰 발라드, Wasat al-balad)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이슬람 이후 시대에 대한 전시가 이렇게 한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르단이 소위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절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정말 전시할 변변찮은 유물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요르단이 천 년이 넘는 세월 내내 무인지대였던 것도 아니고, 우마이야 왕조 시기 세워진 사막 궁전들이 집중된 지역이자 그 이후에도 시리아 등 샴 지역과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성지순례의 통과지이자 무역로이기도 했습니다. 14세기의 여행자인 이븐 바투타 역시 다마스쿠스에서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오늘날 요르단 지역을 지나서 메카로 향하기도 했지요. 정말 그렇게 전시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전시하지 않기로 한 것은 아닐까요?

이 하나의 전시실에서 그나마 가장 집중적으로 전시되는 시대는 우마이야 왕조 시기입니다. 우마이야 시대는 이슬람 전파 이후 여러 왕조들 중에서 별도의 안내문을 통해 자세히 설명되는 유일한 시대이며, 전시물도 가장 많습니다. 마피는 이슬람 전파 이후의 오랜 시대 중 그나마 우마이야 왕조가 조명을 받는 이유에 대해, 우마이야 왕조가 여러 무슬림 제국들 중 요르단 인근 지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유일한 왕조이자 요르단 지역이 왕조의 중심부이던 유일한 시기였임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지리적 중첩은 현대 요르단의 우마이야 왕조의 계승성 및 7세기 경 이슬람 세계의 지배세력이었던 우마이야 왕가와 현대 이슬람-아랍 세계의 지배적 위치를 추구하는 요르단 왕가 사이의 유사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라는 것이 마피의 해석입니다(Maffi 2002, 219).

또한 표지판에는 661년부터 1916년까지로 되어 있지만, 사실 전시실 내부의 유물의 시대를 따져보면 우마이야 왕조에서 시작해서 맘루크 시대로 끝납니다. 즉, "이슬람 시대"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 전시실에서 오스만 시대 전시물은 딱 하나, 오스만 시대 주조된 금화를 제외하면 전무합니다. 사실 이 금화도 뭐 오스만 지배 시기 요르단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요르단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란과 인도의 무슬림 왕조들인 사파비 왕조, 부와이흐 왕조, 가즈나 조나 일칸국의 주화와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전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전시실을 통해서는 요르단이 약 500여년 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영역 내에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유일한 오스만 시대 유물 - 심지어 어떤 술탄때 주조되었다는 설명도 없이, 
단순히 오스만 제국 시대(1299-1918)의 주화라는 정보, 이게 다입니다.


같은 유리함 내에 전시된 사파비 시대의 주화 - 차라리 사파비 은화는 어느 국왕 시기 주조되었다는 정보라도 있군요. 


카이로에서 주조된 파티마조의 금화와 
이란-이라크에 근거지를 두던 부와이흐 왕조의 금화, 
인도-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가즈나 왕조의 은화


폰카로 찍은 사진이니 사진의 품질은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주화 전시를 보면 고고학박물관의 빈약한 이슬람 이후 시대 전시가 정말 전시할 만한 유물이 없어서 그런 건지 다시 의문을 품게 됩니다. 요르단을 넘어 카이로에서 주조된 주화와 이란과 이라크 지역 왕조들의 주화까지 전시하는데, 만약 이슬람 이후 시대와 문명을 전반적으로 각잡고 조명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설령 요르단 내의 유물이 빈약해도 얼마든지 다른 지역의 유물들로 전반적인 시대 흐름과 변화를 아우르는 전시를 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카이로의 이슬람 예술 박물관의 전시는 이집트 내의 유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고학박물관의 이슬람 시대 전시는 그냥 이슬람 이후 시대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박물관 내 이슬람 시대 전시실 한켠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강조가 그나마 이슬람 전파 이후 시대와 현대 요르단 사이의 계승성과 관련된 주장을 반영하고 있지만, 고고학박물관 그리고 이제 살펴볼 국립박물관에서의 압도적인 이슬람 이전 시대에 대한 강조 앞에서는 무색한 수준입니다.



2014년에 새로 개장한 국립박물관.
새로 지은 박물관이니만큼 요르단 내 주요 고고학 유물들을 수집, 전시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도 이슬람의 시대는 없습니다


고고학박물관보다 훨씬 큰 시내에 있는 국립박물관도 매한가지입니다. 국립박물관은 이슬람 전파 이전 시대에 대한 고고학박물관의 소규모 전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 박물관에서도 전시는 비잔틴 시대로 끝납니다.


국립박물관의 전시실 배치
기원전 7,700-7,500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最古)의 사람 모습의 조각상이 출토된 
아인 가잘 지역에서 시작, 비잔틴 시대로 끝납니다.



암만 동부, 아인 가잘(Ayn Ghazal)에서 발견된 1만년 전의 사람 조각상


나중에 다루겠지만 거의 창고 수준인 이집트 고고학박물관과 달리, 요르단 고고학박물관은 관람객들에게 굉장히 친절한 장소입니다. 각 전시실마다 뚜렷한 테마와 시대구분이 되어 있고 해당 시대 요르단 지역의 역사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으며, 전시물이 어디에서 발견되었고 어떤 시대의 유물인지에 대해서도 영어와 아랍어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도와 연표, 심지어 고대 비문의 해석까지 병기되어 있을 정도죠. 유럽이나 미국의 박물관은 제가 가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중동에서 이렇게 친절하고 자세한 박물관은 저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립박물관은 이런 공력을 들여 이슬람 이전 요르단의 문명과 역사들을 중점에 두고 보여줍니다.


청동기 시대 요르단와 인근 중동 지역의 역사를 대조해놓은 연표


성경에서 허구한날 이스라엘인들과 투닥대며 싸운
가나안(오늘날 요르단) 지역의 세 왕국, 암몬, 모압, 에돔 왕국의 영역


기원전 9세기경 모압의 왕이었던 모셰아(Moshe'a)의 석판
요르단 고대왕국이 직접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열왕기 2장 3절에 묘사된 사건에 대해 또다른 당사자인 모압 왕국이 남긴 유일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번역본이 옆에 병기되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어로 쓰여진 기원전 5세기의 석판
석판과 시대상, 그리고 역사적 의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더불어 해석까지 달려있습니다.



사해문서도 요르단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해문서 전시실이 박물관의 마지막 전시실이지요.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e_Jordan_Museum

유물과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 외에도, 요르단 국립박물관은 다른 중동의 박물관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관람 외의 체험활동 기회도 제공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자기 이름을 아람어, 나바트어 및 그리스어 문자로 변환해서 출력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제 이름이 아람어로는 저렇다네요.


요르단, 페트라와 나바테아의 계승자

이처럼 현대적이고 방문객 편의를 고려한 박물관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강조되는 시대는 바로 페트라의 민족, 나바테아 시대입니다.


나바테아 전시실을 보여주는 표지판.


나바테아 전시실 내부
사원 부조부터해서 나바테아 아이들의 놀이문화, 역대 나바테아 제왕들과 그들 시대에 만들어진 주화들
정치체제, 사회상, 당대 유물 등 나바테아 문명에 관한 것이라면 다 전시해두고 있습니다


국립박물관에서의 나바테아 문명에 대한 강조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르단의 가장 대표적 관광지 하면 딱 떠오르는 페트라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나바테아인 아니겠습니까. (사족으로, 외국인의 입장료도 기껏해야 5디나르(약 8천원)를 넘지 않는 요르단 내의 다른 유적지와 달리, 페트라는 학생비자나 노동비자 등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요르단 체류증이 없는 외국인 관광객의 입장료는 무려 50디나르(약 8만원)이나 하는, 짭짤한 관광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요르단과 페트라, 그리고 나바테아 문명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것은 요르단의 대외적 국가이미지를 형성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나바테아 문명과의 연결성은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던 요르단의 고유한 국가정체성 형성과도 관련됩니다. 나바테아 문명은 중동 내 다른 지역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요르단에 근거지를 두던 문명이었고, 현대의 주민들과 직접적인 연결성을 주장하기 힘든 이라크나 이집트의 고대 문명과는 달리 현대 아랍인의 직접적인 선조로 여겨지는 문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고대 나바테아인을 현대 요르단인의 조상으로 규정하고, 현대 요르단 국가와 요르단인에게 나바테아인들의 후손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점은 훨씬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요르단 지역에서 발전하고 살아온 나바테아인들은 요르단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을 제공하지요. 플레밍은 70년대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 이스라엘의 "요르단이 곧 팔레스타인이다"라는 담론적 위협에 맞서 요르단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성해야 했던 왕실의 대응이 바로 이러한 나바테아 문명과의 연계를 토대로 한 특별한 요르단 정체성 형성이라고 주장합니다(Fleming 2015, 78).


페트라 파피루스 전시


이런 관점에 따라 국립박물관의 나바테아 전시에서도 나바테아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의 연결성을 엿볼수 있는 전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바테아 문명의 전성기를 지난 뒤, 비잔틴 시기인 6세기 경 페트라 교회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와 관련 문서들은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페트라가 주요 지방 도시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전시됩니다. 특히 두사리오스(Dusarios)나 오보디아노스(Obodianos)와 같은 6세기 경 페트라 기독교도 귀족들의 이름이 나바테아 문명의 전성기 시절의 나바테아어 인명 - 두사라(Dusara)나 우바다('Ubadah)와 유사하다는 점은 나바테아인들의 문화와 정체성이 기독교 비잔틴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페트라 파피루스에 대한 국립박물관의 설명
진한 글씨로 강조가 된 부분에 주목하세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점은 이 페트라 파피루스는 그리스어로 쓰여있지만 잠의 집(bayt al-Menam, بيت المنام), 원로들의 집(Darat al-Akbar, دارة الأكبر) 등 아랍어 단어가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미 당대 페트라와 나바테아인들의 후손 사이에서 아랍어가 널리 쓰이던 상황이었음을 보여주죠. 그러고 더 나아가 아랍어를 사용하던 6세기 페트라의 나바테아인들의 후손들과, 현대 아랍인, 특히 요르단인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현대 요르단인의 조상인 나바테아 문명이라는 주장인 이렇게 강화됩니다.

나바테아인들과 관련된 또다른 흥미로운 전시는 박물관 내 여러 곳에 있는 소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내내 걸어다녀야 하는 박물관의 한 줄기 구원의 빛
소파


박물관 오래 다니다보면 다리 아프고 어디 뭐든 앉을 곳이 있었으면 하기 마련이죠. 관람객 편의를 여러모로 고려한 요르단 국립박물관에는 그런 관람객들을 위해 전시장 곳곳에 이렇게 낙타 안장을 기반으로 만든 소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설명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이 낙타안장은 2,000년전 나바테아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나바테아인들의 흔적이 끊기지 않고 아직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들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는 집단은 누구일까요?

베두윈과 나바테아, 두 정체성 기반의 결합

낙타안장 전시는 나바테아인들 역시 사막의 민족이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만든 안장이 오늘날에도 쓰인다는 것은 그들을 계승한 존재가 마찬가지로 사막의 사람들인, 나바테아인의 안장을 여전히 쓰고 있는 베두윈임을 암시합니다. 나바테아인들 역시도 오늘날의 아랍인과 베두윈들과 마찬가지로 낙타에 의존하던 삶을 살던 사람들임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번 이들이 아랍인, 특히 나바테아인들이 살던 요르단 땅의 베두윈들의 조상이라는 서사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사막의 민족이자 아랍인과 베두윈들의 조상인 나바테아인이라는 서사에서 조금 더 비약해본다면앞선 글에서 설명한 요르단의 베두윈 정체성 주장과 나바테아 문명과 요르단 사이의 계승성 주장을 서로 연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요르단은 스스로의 고유한 국가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 베두윈 문화와 전통을 이용했습니다. 베두윈들이 단순한 사막의 유목민이 아니라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나바테아인들의 후손이라는 서사가 더해지면 베두윈에 근거를 둔 요르단의 정체성은 더욱 특별해지고 자랑스러운 무언가가 됩니다. 나바테아 문명과 베두윈이라는 요르단 정체성의 두 기본요소는 이렇게 결합되어 "우리는 페트라를 건설한 나바테아인들의 후손인, 베두윈의 후예다" 라는 도식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이웃 어떤 나라와도 구분되는 요르단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900만을 특별하게 하는 역사 - 우리는 한 국민이다"


박물관 밖에서도 나바테아 문명과 현대 요르단 사이의 계승성 주장의 또다른 증거를 우연히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로마 극장 옆에 있는 요르단 일간지인 알 가드(Al-Ghad)의 간판인데, 페트라 사진 옆에 "900만을 특별하게 하는 역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직 요르단에서만 찾을 수 있는 페트라와 나바테아 문명의 유산은 현재 요르단과 요르단인들을 다른 아랍 국가 및 이웃 국가 -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 로부터 구분시켜주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근거로 재현되고 해석됩니다. 위 간판에서 보이듯이 페트라와 나바테아 문명은 매력적인 관광지로서의 요르단의 대외적 이미지 형성을 위한 자원을 제공하는 동시에(Maffi 2002, 218), 내부적으로도 (베두윈 문화와 전통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나바테아 문명의 후손이라는 고유한 요르단 민족정체성 형성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처럼 박물관의 전시에서 드러나는 요르단에 대한 서사와 이미지 구성에서 나바테아 문명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현대 요르단의 최대 종교이며, 7세기 이후 1,400년간 요르단 사회에 영향을 끼쳐온 이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고고학박물관과 국립박물관에서의 이슬람 전파 이전 시대 요르단의 고대사와 고대문명에 대한 강조와 전시는 이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이슬람 전파 이후 시대에 대한 서술과 전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듭니다. 위의 국립박물관 전시배치도에서 보이듯이 전시는 비잔틴 시대로 끝납니다. 그나마 고고학박물관이 이슬람 전파 이후 시대를 작게나마 보여줍니다만, 더 큰 국립박물관에서는 이슬람에 관련된 언급이 완전히 부재합니다. 무슨 배경이 있는 것일까요?

기독교 성지의 땅을 주장하는 무슬림 국가

이 역시 요르단의 정체성 구성, 특히 대외적 정체성 구성 전략의 한 결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인용한 이레네 마피의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트랜스요르단이 영국 보호령이던 시절 이 지역의 고고학 조사는 유대-기독교 전통과 역사에 관련된 성경 시대의 유산 또는 중동의 고대 문명 유적 발굴에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고고학계를 주도하던 서구 학자들에게 있어 관심사는 성경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는 성서고고학이나, 지리적으로는 중동에 있었지만 사실상은 서구 문명의 기반으로 여겨진 중동 고대 문명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었지, 이슬람 전파 이후 시대는 관심의 영역에 끼지 못했지요(Maffi 2009, 16-17).

보호령 시대 형성된 고대 문명의 땅, 그리고 성경와 유대-기독교 역사의 땅으로서의 요르단에 대한 인식은 트랜스요르단이 요르단 왕국으로 공식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Maffi 2009, 18). 고대 문명의 땅이자 성경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성지로서의 요르단의 이미지는 요르단만의 고유한 정체성, 특히 서구에 대해 요르단의 긍정적이고 가까운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해석이지요. 그리고 보호령 시대부터 이어진 "성지의 땅 요르단" 주장은, 70년대 들어 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서안 지구의 상실, 이스라엘의 요르단 부정 담론의 성장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요르단의 고유성과 지속성, 존재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페트라와 나바테아 문명의 강조, 베두윈 문화의 강조로 보완됩니다. 동시에 고대 문명, 성경과 기독교 유적에 대한 강조는 요르단이 대외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다양한 종교, 문화와 문명의 공존, 접촉의 땅인 요르단, 그리고 종교와 문명 사이의 대화의 중재자인 하심 왕가"의 이미지를 뒷받침하지요(Maffi 2009, 22-23, Maffi 2002, 217-218).

경제적 요인도 있습니다. 이렇다할 자원이나 산업기반이 빈약한 요르단에게 있어 관광수입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자금원이었고, 고대문명과 성지의 땅으로서의 요르단을 부각하는 것은 보호령 시절이나 독립 이후나 주요 관광객인 서구 관광객 및 성지순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이슬람에 대한 강조보다 더욱 효율적인 전략이었죠. 모스크나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보다는 모세의 무덤이 있다는 네보 산, 아름다운 비잔틴 교회들의 모자이크, 성경에도 나온다는 고대도시 제라쉬나 나바테아의 페트라 등이 이들 서구 출신 관광객 그리고 성지순례객에게 더욱 매력적인 장소였을테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겁니다.

이처럼 고대 문명과 성경, 기독교 시대의 고고학 유적에 대한 강조 - 그리고 박물관 등에서 보이는 이슬람 이후 시대에 대한 비교적 낮은 관심 - 은 문화와 종교적 다양성, 관용과 공존의 나라로서의 요르단 및 문명, 종교간 대화의 중재자로서의 하쉼 왕가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형성하고 강화하며, 이를 통해 서구 관광객과 성지순례객을 끌어모으기 위한 요르단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외적 이미지 형성을 위한 전략에서 이슬람 시대와 유산은 그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겠지요.

잊혀진 사막의 궁전들

애디슨의 2004년 연구는 요르단의 관광산업과 기독교-이슬람 유적의 대비 사이에서 보이는 비중 차이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을 보여줍니다. 애디슨(Addison 2004)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스스로를 서구 관광객과 성지순례객에게 개방적이고 서구적 사회로 제시하려고 하는 요르단의 전략이 기독교 관련 유적에 대한 강조와 이슬람 관련 유적에 대한 은폐, 방치 또는 낮은 관심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주요 관광지로의 연결도로 및 도로 표지판입니다. 그는 요르단 내 주요 도로에서의 기독교 관련 유적(마다바, 마르 엘리아스(Mar Elias), 네보 산, 세례요한의 세례 추정지역이라는 마그타스(Maghtas) 등)과 이슬람 이후 유적 - 특히 우마이야 왕조의 사막 궁전들(까스르 암라(Qasr Amra), 까스르 무샷타(Qasr Mushatta), 까스르 알 암만(Qasr al-Amman), 까스르 투바(Qasr Tubah) 등)로 이어지는 도로와 표지판들을 비교합니다. 그 차이는 아래 두 사진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까스르 투바 도로 표지판(Addison 2004)
황량한 도로, 녹슨 표지판


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마다바 및 네보 산 표지판
제라쉬, 마다바, 시타델이나 로마 극장 등
요르단의 주요 관광지 표지판에는 위에서 보이듯이 해당 지역을 형상화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주요 관광지"만요.
출처: https://in2jordan.com/jordans-holy-sites-christian-pilgrimage-tour/


주요 도로에서 쉽게 안내판과 표지를 찾아볼 수 있는 기독교 관련 유적지와 달리, 요르단의 우마이야 왕조의 성채들은 도로 표지판 상으로는 그 존재가 거의 지워져 있습니다. "사막 궁전"이니만큼 애당초 도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독교 유적에 비해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 접근성이 시작부터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막 궁전들 중 하나인 까스르 무샷타는 암만에서 가까운, 퀸 알리야 국제공항 근처에 위치합니다.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고 방문을 끌어오고자 한다면 사실 정말 좋은 입지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암만 시내에서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까스르 무샷타의 "존재" 자체를 알려주는 표지판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모르는 이상 아예 인지할 수가 없지요.


퀸 알리야 국제공항 바로 근처에 있는 까스르 무샷타


에디슨은 정부 예산으로 건설되는 도로 정비 및 도로 표지판의 차이를 통해 각 유적지에 정부가 기울이는 관심의 정도를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유적지에 따른 정부 관심의 차이는 도로와 표지판 수준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만은, 에디슨의 연구는 적어도 한 측면에서는 실제로 차이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막의 까스르 암라
출처: http://famouswonders.com/the-qasr-amra/


정부가 기독교 및 이슬람 관련 유적에 보여주는 관심의 차이, 그리고 두 종류의 유적지 중 어느 쪽을 더욱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지의 차이는 실제 관광객들의 방문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요? 뭐 제가 진지하게 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학술적 근거에 적합한 정교한 연구를 수행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제가 속한 한국외대 아랍어과에서는 매년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요르단으로 연수를 나가 최소 6개월 정도 머무르고 돌아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요르단 체류 경험을 지닌 많은 학생들을 만나봤지만,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을 방문해봤다는 학생은 단 하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개는 아예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페트라나 제라쉬 등 요르단이 밀어주는 유적지는 요르단 갔다왔다 하면 거의 모든 학생이 다 다녀오는 곳입니다.

하나 이슬람 전파 이후 시대의 유적이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지역이 있습니다. 바로 아즐룬 그리고 카락에 있는 십자군 성채이지요. 그리고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우마이야 왕조보다는 훨씬 익숙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카락 성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Kerak_Castle


일화적 사례일 뿐이지만, 꽤 흥미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들, 특히 까스르 암라는 페트라나 와디 럼과 같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찾고 유명한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만, 관광지로서의 홍보나 인식은 두 곳에 비해 매우 떨어집니다 - 사실 요르단 꽤 오래 머무른 학생들도 못 들어본 학생들이 태반입니다 -. 이런 차이 역시 요르단 정부가 어떤 지역을 관광지로 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차이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이슬람 이전 고대 문명과 기독교 시대 유적이 강조된다는 점은 위에서 설명했던 관광객 유치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요르단의 대외적 국가이미지 형성 - 외국인, 특히 서구 관광객들이 거부감 없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숙한 성경, 기독교, 고대 문명의 이야기를 지닌 곳으로서의 요르단 - 전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요르단은 인구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국가이며, 이슬람의 정체성은 결코 부정되거나 배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박물관과 관광 안내의 영역에서 이슬람 문명의 흔적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요르단의 사례는 무슬림 다수 국가라도 항상 이슬람의 정체성을 적어도 대외적 영역, 관광 유치의 영역에서는 전면에 내세우지만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개별 국가의 고유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환경이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 대외적 이미지 구성을 위한 다양한 전략과 성격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이 제 나름의 결론입니다.

참고문헌

Addison, Erin H. "The Roads to Ruins: accessing Islamic heritage in Jordan." In Marketing Heritage: Archaeology and the Consumption of the Past, edited by Uzi Baram and Yorke Rowan, 229-247. Walnut Creek: Alta Mira Press, 2004.

Fleming, Shannon. "Searching for the Jordanian Nation: Archaeology and the Fluidity of Nationalism." Master's Thesis., Brandeis University, 2015.

Maffi, Irene. "New Museographic Trends in Jordan: The Strengthening of the Nation." In Jordan in Transition, edited by George Joffe, 208-223. London: Hurst & Company, 2002.

Maffi, Irene. "The emergence of cultural heritage in Jordan: The itinerary of a colonial invention." Journal of Social Archaeology vol 9. no 1(2009):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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