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아랍의 봄 특별 보고서 2 - 정치적 이슬람/헌법을 위한 길 중동/이슬람권

이코노미스트 아랍의 봄 특별 보고서 1 - 아랍의 봄은 실패했나?

정치적 이슬람

종교의 힘


이코노미스트 2013.7.13


반대 세력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통치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이슬람주의자들은 느끼고 있다.


 6월 초 어느 일요일 시리아 알레포의 거리의 커피 상인인 무함마드 까타는 무전취식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주기를 거부했다. 그는 예언자가 온다 하더라도 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턱수염을 기른 반군 전사가 들었다.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외치며 그를 쏴 죽였다. 무함마드는 고작 15살이었다.

 같은 날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는 28살의 하쉠 살만이 신을 만났다. 그는 이란의 시리아 정부 지지에 항의하기 위해 이란 대사관 밖에서 벌어지는 농성에 참가했었다. 갑자기 노란색 완장을 차고 몽둥이와 권총을 든 건장한 사람들이 난입했다. 노란색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의 정당 겸 민병대 헤즈볼라의 색으로 최근부터 시리아 내전에 끼어들었다. 살만은 총알 두 발을 맞았다.

 이 사건들은 다수 순니파와 잘 무장한 쉬아파 사이의 유혈 충돌로 이어진 시리아 내전 매일매일의 일면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내전은 쉽게 보기 어려운 증오를 만들어냈다. 이 희생자들 누구도 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나는 순니파 무슬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쉬아 무슬림이었다. 이 둘 모두 자신들의 종파 일원에 의해 살해당한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종파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라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두 사건 모두 살인자들은 자신들을 신앙의 배신자들을 처벌하는 자라고 여겼다.

 이슬람은 다른 종교들과 같이 매우 광범위하다. 이슬람 내에는 정치가 신앙의 확장된 모습이라고 믿는 정치적 이슬람이 알 카에다의 검은 색에서부터 사우디 스타일의 와하비즘의 녹색 그리고 창백한 근대화된 유령들 등 다양한 색으로 나타난다. 무엇이든간에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신의 의지를 해석하고 부과할 권한을 포함한다. 공공연히 스스로를 세속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많은 아랍인들이 이들에 대해 불편해 할 뿐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강제의 권력에도 반대한다. 아마도 이 점이 정치적 세력으로써의 부정할 수 없는 이슬람의 부상 그리고 공개적인 세속주의 정체성의 표현의 증가 가운데서 의문들이 증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의 선택


 이는 이상한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1990년대부터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자유 선거가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다수를 차지했으며 아랍의 봄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이집트에서는 오랜 기간 불법화된 무슬림형제단과 그들의 동맹인 원리주의적인 살라피스트가 혁명 이후 첫 번째 치러진 선거에서 의회 의석의 2/3을 차지했다. 그리고 형제단의 후보인 무함마드 무르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예멘과 리비아의 경우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어 어느 한 세력이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지만 유권자들은 대개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표를 던졌다. 튀니지에서도 오랜 세속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주요 이슬람주의 정당인 나흐다 당이 다른 어느 정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극단주의자들보다 이슬람주의자들 - 즉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과 넥타이를 맨 남자들, 부르카가 아닌 머릿싸개를 두른 여성들 - 이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이 대세이다. 새로 힘을 얻은 이들 이슬람주의자들은 대개 더 엄격한 종교적 법을 도입하는 것에 주저했다. 각국의 소수파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이슬람주의자들은 유권자들이 신에 가까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보다 정부의 부패를 척결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이슬람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정치에 신앙을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방법을 찾고 있는다고 하더라도 세속주의적 표현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교적 새로운 경향이다. 순니-쉬아 분열은 14세기간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잠잠한 상태가 이어졌다. 종파주의는 인구 대다수가 압도적으로 순니파인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상호 혼합이 더 강한 곳에서는 근대에 들어 상호 간의 결혼이 더욱 빈번해졌다. 오랜 세월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쉬아파 이란과의 협력에 대해 생각해왔으며 대부분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아직도 통일된 무슬림 공동체 - 움마Umma - 의 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쉬아파를 이단으로 보는 와하비즘 이념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머니에 기반을 둔 영향력 증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공동의 투쟁이라는 의식의 약화, 역사적으로 소외받았던 여러 국가들에서의 쉬아파 집단의 강화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이 두 분파는 서로 멀어졌다.

 이 분열은 이라크를 시작으로 최근 몇 년간 극심해졌다. 2003년 이라크의 독재자인 사담 후세인의 몰락은 그가 오랫동안 탄압해왔던 쉬아파 하층민들에게 분노를 표출할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시대로부터 이라크를 통치해오던 순니파들의 우려를 야기했다. 미국의 지배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담 정권의 인사들을 싹 쓸어버린 것은 부적절할 정도로 순니파에게 상처를 주었다. 새로운 정부 요직들은 주로 정당 할당제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잘 조직된 쉬아파들이 가장 득을 보았다.

 양 집단의 이슬람주의 세력은 모두 점령자에 대한 무장 저항을 옹호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순니파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조하는 알 카에다의 등장은 양 종파 간의 상호 협력이 아닌 파괴적인 경쟁을 야기했다. 알 카에다는 2006년 사마라의 쉬아파 성지의 황금 돔을 폭파했고 이 사건은 수많은 희생자를 가져온 “종파 청소”로 이어졌다. 한때 이라크의 세계시민적인 수도인 바그다드는 각 종파의 게토로 얼룩진 도시가 되었다. 분노를 품고 피폐해지고 폭력적인 순니파 세력은 비교적으로 조용하고 번영하는 북부의 쿠르드인들이나 남부의 쉬아파와 대비되고 있다.

 미국의 개입은 더 큰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이란 행정부가 핵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 내에서 유일한 핵보유국이라는 지위를 지키기 위해 이란을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 쉬아파 세계의 최강대국은 헤즈볼라에 대한 오랜 후원을 더욱 강화했다. 이 레바논의 정당 겸 민병대 조직은 2006년 이스라엘과의 짧지만 잔혹한 전쟁을 통해 몸을 풀었다. 2년 뒤 헤즈볼라는 베이루트의 순니파 지역을 장악하고 자기들 마음에 내키는 정부를 세웠다. 이 사건은 인구의 1/3이 순니파, 1/3이 쉬아파 그리고 1/3이 주로 기독교도 및 다른 종교로 구성된 레바논의 불안한 종파적 균형을 심각하게 흔들었다.


급진화된 시리아


 이웃의 시리아의 상황도 똑같이 복잡하다. 그러나 시리아의 분열은 오랜 기간 봉인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쉬아파의 비교적(秘敎) 분파이자 지배 세력인 아사드 가문 및 측근들이 속해 있는 시리아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알라위파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2011년 3월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면서 종파 갈등도 뒤따라 이어졌다.

 아사드 정권은 시위를 분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를 종파 갈등으로 바꾸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의 군인들은 튀니지나 이집트의 군인들과는 달리 비무장한 군중에게도 총을 쏠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충격을 받은 시위대는 곧 잡히는 무기라면 무엇이든 응사하기 시작했고 이는 아사드 정권의 자신들은 민중 봉기가 아닌 무장 반란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독교도 및 다른 소수종파에 대한 배후가 불분명한 공격이 곧 뒤따랐고 이는 친정부 민병대 깡패들의 조직을 촉발했다. 정권은 순니파를 처벌 대상으로 정하고 마을을 습격, 주민을 학살하도록 깡패들을 보내거나 순니파 구역을 폭격하거나 수천 명을 고문하였다. 순니파 주민들의 버려진 주택은 자연스럽게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시리아에서 새로이 활기를 띄기 시작한 벼룩시장은 “수크 앗 순나Souk al-Sunna”, 즉 “순니파의 시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까지 시리아의 순니파들은 자신들을 종파적 분류로 정의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시리아 인구의 2/3은 순니파였으니 말이다. 그들의 생각에 계급 및 지역 차이는 종파 차이보다 더 중요했다. 그러다 아사드 대통령의 잔혹한 억압으로 인해 이들, 특히 가장 피해를 입은 가난한 계층들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혁명 2년째가 되면 혁명의 이상적 주동자들은 물러나고 분노하고 급진화된 순니파 핵심 세력이 떠오르게 된다. 이들 순니파는 열정적이고 극단적이며 가장 효율적으로 싸운다는 평판을 얻은 지하디스트 집단의 네트워크에 자극을 받았다.

 이런 자가 실현적인 예언에서 아사드는 스스로를 광신적이고 가난하며 외국의 지원을 받는 순니파 무리에 맞서는 시리아의 다원적인 중산계급의 보호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극단적 지하디스트 집단은 잔혹한 복수극을 저지름으로써 아사드의 이런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시리아의 경우에서 종파주의의 늪으로 빠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으며 다른 아랍 국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바레인의 순니파 정부는 잔혹성에서는 좀 덜할지라도 아사드 대통령과 같은 일을 했다. 바레인 정부는 2011년 2월 발생한 입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부분 쉬아파로 구성된 시위대를 이란의 “제 5열”로 묘사했다. 이 작전은 개혁을 요구하는 국내적 문제를 모든 걸프 순니 국가에 대한 광범위한 위협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2년 뒤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쉬아파 마을들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검은 깃발과 순교자들의 사진이 새로운 음침한 저항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종파주의의 귀환이 1,400년간의 이슬람 내의 불화라기보다는 근대 국가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버몬트 대학교의 정치과학자 그레고리 거스(Gregory Gause)는 최근 한 보고서에서 종파 정체성은 레바논같이 중앙 정부가 취약한 국가들에서 가장 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억압적이고 강력한 중앙집권화 국가인 시리아와 이라크에서의 갑작스러운 종파 갈등의 폭발은 이 국가들이 왜 그토록 빨리 소란으로 치달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집트의 인구 10%를 차지하는 콥트교도에 대한 간헐적인 공격 또한 사회 갈등을 중재하는 정부의 능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종파 갈등은 종교적 신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권력과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에서 일어난다. 싱가포르 국립대의 이라크인 학자인 파나르 핫다드(Fanar Haddad)는 “이라크 종파 갈등에 관해 나타나는 신앙과 신학의 복잡성은 유럽 우익 집단들의 수사학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와 다르지 않다. 신앙으로써의 종교보다는 정체성의 종교가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핫다드는 이 점이 변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경전에 입각하여 종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은 더 이상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종파의 중심지인 까심의 쉐이크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헤즈볼라가 시리아 내전에 전사들을 파병한 것은 순니파 세력의 반작용을 일으켰다. 모스크 설교에서는 쉬아파의 배반에 관한 옛날 옛적의 일화들을 다시 꺼내들고 있다. 무슬림형제단 단원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유명한 설교가인 유수프 까르다위는 쉬아파와의 협력을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면서 헤즈볼라를 사탄의 당으로 규정했고 이들에 대한 지하드를 역설했다.

 위협적인 어조가 늘어난다는 점은 이슬람 세계 전체의 종파 갈등에 음울한 그림자를 던져주고 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대리전으로 나타나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정학적인 갈등은 언젠가 그 위협스런 머리를 치켜들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튀니지나 이집트와 같은 자유로운 정치 분위기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이 통치의 실제적 경험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재 정권 하에서 수십년간 억압되어 있던 그들은 영원한 반정수 세력으로의 지위를 즐겼다. 그들은 “이슬람이 해결책이다” 라는 구호 말고는 다른 정책적인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직면한대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옆에서 불평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실험은 무슬림형제단이 사상 처음의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이득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집트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형제단이 겪고 있는 문제는 부분적으로 형제단이 초래한 것이다. 형제단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이집트의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고 생각해왔다. 타락하고 비굴한 서구화된 엘리트에 비해 이슬람주의자들은 스스로가 더 높은 도덕적 품성을 가진 아랍 고유 문화의 실체화라고 주장해왔다. 그들의 빈틈없는 내부 조직은 형제단이 능력 있다는 인식을 주었고 결국 선거의 승리로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형제단이 조직력에서 보여준 능력을 뛰어난 정부를 만듦으로써 보여주길 바랬다.


말하긴 쉽고 행동하긴 어렵다


 이 희망은 곧 깨졌다. 지역 정부에 자문을 해주는 한 국제 컨설턴트의 말에 따르면 형제단은 “의지는 큰데 기술은 부족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이집트의 당면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능력보다는 신앙심을 보고 사람을 임명했다. 지난해 12월 법률 전문가들과 비이슬람주의 세력의 반대를 뚫고 국민투표를 강행한 헌법은 문제 투성이인걸로 드러났다.

 권력을 얻자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전의 독재자들의 특성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경찰과 군부의 편을 들었고 사법부는 권력 남용 혐의로 고소된 수십 명의 전 정권 인사들을 무죄 석방했다. 동시에 무르시 정부는 “국가원수에 대한 비방” 혐의로 젊은 혁명가들을 기소했다. 형제단의 오만한 도덕적 우월주의와 내재적인 비밀주의는 야당 세력과의 소통을 제한했다. 대신에 형제단은 국영 미디어, 정부 지원금을 받는 물자를 이용하고 명망 있는 야권 세력 지도자를 배제한 “대화”를 TV를 통해 방송하는 전략 등을 통해 적들을 뿌리뽑고자 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곧 이집트 대중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정교하고 복잡하며 변덕스럽다는 점을 깨달았다. 2011년 말 의회 선거에서의 승리 이후로 형제단은 지지율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2012년 6월 무르시 대통령은 근소한 차이로 선거에서 이겼지만 그의 지지율은 지난해 9월 80%에서 올해 6월 30%로 추락했다. 한 시사 해설자가 “대중적인 고발”로 묘사한 6월 30일의 대규모 시위와 군부 쿠데타 전에도 무슬림형제단은 그 이전까지는 형제단이 지배해온 대학생 학생회나 전문 직종 노조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서로 다투는 수많은 이집트의 세속주의 정당들은 형제단의 몰락으로 득을 볼 위치가 아니다. 만약 총선이 가까운 시일 내로 치러진다면 가장 큰 득을 볼 세력은 형제단의 이슬람주의 경쟁자인 원리주의적인 살라피스트 세력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의 호소력은 그들의 종교적 입장이나 샤리아 법을 도입하려는 것에서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지의 여부에서 나온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실업률 상승, 전력과 연료 부족 등의 문제가 계속된다면 이집트의 엄청난 하층민들이 다시 한번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은 분명하다. 



<이집트 제헌위원회>


 헌법 만들기

긴 행진


혁명 이후 헌법을 만드는 느린 작업이 시작되었다.


 알리 아흐메드는 역경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아도니스(Adonis)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83살의 시인인 그는 1956년부터 그의 모국인 시리아를 떠나 망명 생활 중이다. 아랍 모더니즘의 아버지이자 아랍의 T. S. 엘리엇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또한 심한 비평가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2006년 그는 저 유명한 “아랍인의 멸종”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아랍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상상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시리아의 시인 아도니스>

 그러나 아도니스는 아랍의 봄에도 기뻐하지 못했다. 그는 혁명가들이 변화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독재자를 몰아내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 반대하던 정권과 똑같은 권력의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국가에 의한 전제정치를 종교에 의한 전제정치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는 또한 자국민을 죽이고 있는 아사드 대통령과 대화를 해야 하고 반정부 세력은 무기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시리아 반군은 분노했고 그가 안전한 파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아도니스가 아사드 대통령과 같은 알라위파 출신이라는 점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몇몇 반군은 그가 알라위파이기 때문에 정권의 편을 든다고 비난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난 2월 알레포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마라트 누만(Ma'arrat Numan) 시의 시민들이 10세기 경 시리아의 유명한 장님 시인인 알 마리(al-Ma'arri) 동상의 목을 잘라냈다는 사실이 시리아 사람들이 아도니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알 마리는 아도니스도 속해 있는 신랄한 회의주의 사조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목이 잘린 알 마리의 흉상
1,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본다면 아랍 세계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에 대한 비관주의는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아랍의 봄이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서두른 성싶다.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국가를 포함하여 아랍 전 지역에서 사회의 심원한 변화를 초래할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한 예로 익히 알려져 있듯이 아랍 왕정들은 공화국보다 혁명에 대한 저항력이 더욱 강한 편이다. 이는 혁명 압력이 부재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아랍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던 2011년 2월 약 4만 명의 모로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요르단이나 모로코 모두 그 이전에도 간헐적인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 쿠웨이트에서도 5만 명 - 이 나라 국민의 수를 생각해본다면 많은 수이다 - 이 지난 11월 평화 시위를 연 바 있다.

 가장 억압적인 왕정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억압 받는 사우디아라비아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쉬아파 내에서 저항이 터져나올 것이라는 점은 예상된 바였다. 석유가 풍부한 동부 지역에서 살지만 석유로 인한 이득 분배에서 배제된 쉬아파들은 가까운 바레인의 쉬아파 시위대가 어떻게 분쇄되는지를 보고 분노했다. 2011년 2월 이래로 쉬아파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17명의 사우디 쉬아파가 사망했다.

 더 놀라운 것은 작지만 활력 있는 사우디 여성들의 시위이다. 이들은 반테러리즘 법률로 수감된 친척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여성 시위대 대부분이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인권 신장과 같은 요구는 수감자 석방 운동을 지지하는 사우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와 같았다. 추방된 저항자의 목소리도 계속 이어졌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무즈타히드”(Mujtahid)라는 필명으로 트위터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 대한 비판을 올리는 사람으로 그는 1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지니고 있다.

 아도니스가 혁명가들은 비록 잠깐일지라도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해 연합함으로써 힘과 추진력을 얻었다고 본 점은 옳았다. 그러나 아랍 왕정이 많은 국민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정권을 몰아내자는 목표의 힘은 곧 약해졌다. 비평가들은 국가와 시민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 필요하다고 본다.

 쿠웨이트의 경우 주된 요구는 50명으로 구성된 국회에 대한 알 사바 왕가의 지나친 영향력을 제한할 새로운 선거법 제정이었다. 선거법 개정에 대한 요구는 부와 권력의 공평한 분배와 더불어 요르단 시위에서도 주요 요구 사항이었다. 모로코에서 사람들은 부패 척결, 표현의 자유 및 왕실 권한을 제한할 새 입헌질서 수립을 요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요구 사항은 더 많고 다양한데 이는 이 나라에 국민의 뜻을 대표할 기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왕정 국가들은 이런 요구를 다양한 방법으로 받아넘겼다. 아랍의 봄이 시작될 때 쿠웨이트의 국왕 쉐이크 자베르 알 사바흐는 모든 국민에게 식량 구입권과 3,500달러를 줬다. 또한 2010년부터 제기된 불만들을 무시하며 그는 12월 의회 선거를 강행했고 결국 많은 정파들이 선거에 불참했다. 쿠웨이트 정부는 또한 비판자들을 기소하고 때때로 가혹하게 대했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그럼에도 걸프 국가들 중 가장 정치적으로 개방된 국가이다. 자베르 국왕은 12월 총선과 관련된 선거법을 법원의 심사에 맡기기로 동의했으며 이에 대한 최근 판결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판결이었지만 결국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새 투표를 진행하도록 결판이 났다. 쿠웨이트의 야권 세력은 전문적인 요소를 넘어 강력한 개혁 운동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걸프의 석유가 풍부한 나라는 아니지만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 역시 국민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 1952년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 그가 지명한 위원회는 총리의 선출, 언론인 수감시킬 수 있는 언론법의 개정, 정당 결성 허용 및 선거구 재조정 등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이 정도도 큰 진보로 보이지만 여전히 왕실히 많은 권한을 지니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종교 정당 금지에 반대하며 언론인들은 여전히 계속되는 제한에 재갈이 물려 있다.

 모로코의 무함마드 6세 국왕은 모로코 헌법을 완전히 새로 씀으로서 가장 앞서 나갔다. 모로코 정부는 인터넷으로 헌법 초안을 국민들에게 보내 의견을 주기를 부탁했다. 2011년 7월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초안은 98.5%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또한 중도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국왕은 기꺼이 정의개발당의 지도자를 새 총리로 임명했다.

명백한 이런 조용한 변화는 모로코의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외적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점이 많다. 비밀주의의 모로코 왕실은 여전히 에너지, 부동산 개발, 은행 및 보험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불만을 품은 세력 특히 언론이나 급진적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로써는 대규모 시위의 조짐은 없지만 압력이 계속됨에 따라 언젠가 터져나올 수도 있다.


참을성이 필요한 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에서도 불만 사항은 특정 사안에 집중되어 있다. 사우디 정부는 보수적인 다수와 서구화된 소수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고 반대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에 뛰어나다. 현 국왕 및 왕세제 모두 늙고 병에 시달리고 있기에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현재로써는 최선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의 변화는 이제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종교 기구들도 조금씩 통치자에 대한 복종을 명하는 엄격한 와하비즘의 이념에서 멀어지고 있다. 심지어 몇몇 종교인들은 통치에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웃 카타르에서 일어난 일도 사우디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어 놨다. 6월 걸프 국가에서 가장 젊은 국왕이었던 쉐이크 하마드 븐 칼리파 앗 싸니가 33살의 아들인 쉐이크 타밈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타밈 국왕은 곧 현 내각을 더 젋은 세대를 위한 새 내각으로 대체했다. 카타르는 여전히 왕이 모든 권력을 쥔 독재 국가이지만 인기 많던 통치자가 권력의 최정점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중요하다. 한 예로 43년간 오만을 통치해 온 술탄 까부스 국왕에게 자식들이 없음에도 왜 아직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건지에 대한 의문이 커져가고 있다.

 모든 아랍 왕국들은 국민의 요구에 꽤 기민하게 대처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전 아랍인들 사이에서 변화의 요구가 얼마나 넓게 확산되고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요구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도 드러났다. 거의 모든 곳의 시민들은 더 많은 정의, 투명성, 책임, 권력에 대한 제한, 더 평등한 경제 정책, 중앙 권력의 분할, 표현의 자유 등을 요구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헌법 질서가 필요하다. 헌법을 먼저 올바르게 수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수정된 헌법들의 면면을 보면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국민을 진정시키기 위해 헌법을 서둘러 대충 고친 왕정 국가들은 논외로 하고 최근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가 완전히 새로운 헌법을 도입했으며 곧 튀니지도 새 헌법을 제정한다. 리비아, 수단, 예멘은 아직 새 헌법 제정까지는 많이 남아 있다. 알제리 정부도 헌법 개정을 약속했다. 이 국가들은 모두 다른 접근법을 취했지만 그 외형은 다 비슷하다.

<이라크의 투표 장면
투표는 하지만, 평화는 요원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나라는 이라크였다. 2005년 미국 점령 시기 이라크는 팡파르 속에 새 헌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라크의 민족, 종파적 갈등, 오랜 독재의 역사, 풍부한 석유 자원 수입의 분배 및 빠른 결과를 보고싶어 하는 미국의 조급함 등으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순니파 정치인은 헌법 초안 작성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새 헌법의 대표성이 현저하게 타격을 받았다. 순니파의 보이콧으로 인해 이라크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쿠르드인들이 새 헌법 내에서 큰 이득을 얻었고 거의 준독립상태인 북부의 쿠르디스탄 자치정부를 얻어냈다. 쉬아파들도 이라크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지배를 확립했다.

 그러나 새 헌법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순니파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다수 쉬아파와 쉬아파가 장악한 정부가 통과한 반테러리즘 법안의 부당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느꼈다. 지난 12월부터 이라크의 순니파 다수 지역은 반영구적인 봉기 상황에 돌입했다. 극단적 지하디스트 집단의 지원자는 솟구쳤으며 4년 전에 겨우 가라앉은 종파 간의 공격과 복수의 피의 순환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이 모두 새 헌법의 잘못은 아니지만 새 헌법의 모호한 문구는 대통령령을 통해 반대파를 탄압하던 쉬아파 총리인 누리 알 말리키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분명히 실패했다. 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함을 이용해 그는 군부와 경찰에 자신의 충성파들을 앉혔고 개인 명령으로 사병 집단을 구성했다.

 쿠르드 자치권에 대한 모호성도 분쟁, 특히 석유 수입을 두고 벌어진 분쟁을 불러왔다. 쿠르드 자치정부는 좋은 조건으로 외국 기업들의 계약을 따냈고 이에 대해 중앙정부는 파이프라인을 차단하거나 석유 수입금 대금 지불을 늦추거나 쿠르드 국경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식으로 응답했다.


계속 지켜야 할 것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혼란 한가운데에서도 헌법을 최소한의 질서로써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순니파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위해 말리키 총리가 쫓겨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남쪽의 쉬아파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순니파도 쿠르드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방제 방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국 지배 당시 제안된 연방제는 나라를 분할하려는 음모로 간주되 배격되었지만 이제는 또다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이라크의 연방제가 성공한다면 연방제는 시리아나 예멘 또는 만약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이 지나친 중앙집권국가들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의 헌법 작성 과정은 더 짧고 폭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똑같이 좌절스러웠다.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선거에서 거둔 “이슬람적” 성취를 헌법승인 국민투표에서도 이어가고자 했다. 이집트의 세속주의 성향의 법원은 형제단의 이런 열정을 막고자 했지만 무르시 대통령은 스스로와 이슬람주의자들이 다수를 장악한 제헌위원회의 면책 특권을 공포했다. 이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지만 지난 12월 헌법 초안이 국민투표에 넘겨져 64%의 찬성으로 통과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새 헌법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무슬림형제단에게도 거의 바로 문제를 일으켰다. 종교 학자들이나 헌법 재판소 헌법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권한에 따라 모두 헌법 초안의 여러 조항들에 반대했다. 헌법 재판소의 하원 해산으로 인해 무르시 대통령은 새 법률 입안에 있어 상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10%의 투표율로 구성된 상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합법성이 없던 기구였다. 최근 공개된 미국 여론조사가인 자메스 조그비가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투표 이후 6개월이 지나자 이집트인 대부분이 헌법을 폐기하기 원했다. 이제 그렇게 되었다. 쿠데타 이후 장군들은 헌법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정지했고 대법원에게 국민투표에 붙일 더 나은 헌법을 작성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위험한 조치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헌법으로 이어질수도 있다.

 튀니지는 헌법 작성에 충분한 시간과 수고를 들인 유일한 아랍 국가이다. 튀니지의 집권 여당인 이슬람주의 세력은 샤리아를 법률의 핵심 구성요소로 삼는 등의 논쟁적인 사안들을 헌법에 넣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11년 10월에 구성된 임시 국회는 헌법 초안 작성을 두고 광범위하게 의견을 묻고 있다. 헌법은 올해 여름 말 국회의원 2/3 이상의 동의로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로 민주주의가 성취되는 것이 아니듯이 헌법을 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랍 국가는 자유로운 언론이나 독립적인 사법부와 같은 기구를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비록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소리치는 군중이나 총소리 속에서도 이런 기구들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열정과 열린 마음으로 카페나 인터넷 포럼에서 진행되는 토론들은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교육 받은 도시 거주자만이 아니라 아랍 세계 전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만들 것이다. 


덧글

  • Luthien 2013/08/04 15:46 #

    http://www.alquds.co.uk/?p=69806 자와히리의 민주주의 디스질과 세트로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 jeltz 2013/08/04 16:04 #

    "정당성은 선거나 민주주의에 있는게 아니라 오직 이슬람법에만 있다" "현 분쟁은 시온주의자와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의 대결이다"

    이야....누가 알 카에다 지도자 아니랄까봐.... 껀수 잡았다 이거죠.
  • 행인1 2013/08/04 23:31 #

    1. 쿠웨이트 국왕 이름에 '자베르'가 들어가니 기분이 묘해지는군요.

    2. 이집트는 군부의 입김하에서 새 헌법을 만들텐데 어떻게 될련지...
  • jeltz 2013/08/05 00:50 #

    저만 거기서 "응?" 하고 간건 아니군요. 뭐 사실 원어 표기는 "자비르"인데 영어에서는 그냥 Jaber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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