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아파의 슬픔의 날, 아슈라 : 어떻게 시작되었나 중동/이슬람권

 
<아슈라, 카르발라의 이맘 후세인 성묘로 향하는 순례객들>

 많은 문화권에서 새해는 지난 해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시기이지요. 하지만 쉬아파들은 이슬람력의 새해를 전혀 다르게 맞이합니다. 이들은 이슬람력의 첫번째 달인 무하람(Muharram)의 첫 열흘을 1,400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집단적으로 다시 떠올리면서 맞이합니다. 쉬아파의 새해는 쉬아파의 3대 이맘,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 무함마드의 조카이자 4대 칼리프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의 죽음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상기하고 떠올리는 기간입니다. 

 관을 든 장례행렬, 눈물을 흘리며 관을 따르는 애도자들, 카르발라 참사를 재현하는 수난극, 후세인과 그를 따르던 자들의 용맹함과 비극을 노래하는 애가 낭송, 그리고 주먹과 칼, 쇠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면서 비애감을 드러내는 사람들까지. 쉬아파의 아슈라(Ashura) 의례는 비무슬림들뿐만 아니라 순니파 무슬림들에게도 낯선 의례입니다. 

 이 의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각 의례는 어떤 상징을 지니고 있으며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회, 정치의 맥락에서 아슈라 의례는 어떻게 해석될까요. 앞으로 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보고자 합니다. 


 
 중동의 현대사에 익숙하신 분들은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 대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집트군은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을 맞아 이스라엘을 기습했고 이스라엘은 초기에 이집트군의 공세에 큰 피해를 입었죠. 
 
 유태인들은 새해가 되면 신이 다음 한 해의 개인의 운명을 생명의 책에 기록하고 새해가 되고 열흘째인 욤 키푸르에 책에 봉인을 찍어 개인의 운명을 확정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욤 키푸르는 지난 해에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신께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서 보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이지요. 

 새해에서 열흘째라? 욤 키푸르는 유태력의 첫번째 달인 티쉐리(Tisheri) 달의 열번째 날입니다. 아슈라는 이슬람력의 첫번째 달인 무하람 달의 열번째 날이구요. 욤 키푸르가 유태인들이 지난 해의 죄를 참회하는 날이라면 아슈라는 쉬아파들이 이맘 후세인을 지키지 못하고 그를 외롭게 죽게 만든 카르발라 사건을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아슈라 의례는 유태교의 영향을 받은 날입니다. 

 하디쓰에서도 아슈라가 유태교의 영향을 받은 날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하디쓰 전승자 중 하나인 무슬림(Muslim)이 모은 하디스에는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헤지라, Hejira)한 뒤 그는 메디나에 있는 유태교 공동체들이 단식하는 것을 보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함마드가 왜 단식을 하느냐고 묻자 유태인들은 "이집트의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모세가 단식했기에 우리도 단식한다."라고 대답했지요. 무함마드는 "모세에 관한 일이라면 너희 유태인들보다 우리가 더 잘 안다."라고 답하고 무슬림들도 이 날 단식하도록 합니다. 아슈라 때의 단식은 예언자가 이주한 지 2년째 되는 해 라마단 달의 금식 계시가 내려오기 전까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무슬림들은 유태인과의 차별화를 위해 열흘째가 아닌 나흐레째에 단식하거나 나흐레, 열흘 이틀을 단식하기도 했죠. 

 오늘날에도 순니파 세계에서 아슈라 단식은 자이즈(Jaiz, 안해도 무방하고 해도 문제될 것 없는 행동)입니다. 2013년의 아슈라는 11월 14일이었는데 이 날 이집트의 일간지 알 아흐람(Al-Ahram)은 최고 권위를 지닌 종교 기구인 알 아즈하르(Al-Azhar)의 종교학자들의 말을 인용해서 아슈라의 기원 및 아슈라에 단식하는 것은 순니파에게도 허용되며 좋은 일이다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죠. 

 모로코에서도 아슈라를 지낸다고 합니다. 모로코의 아슈라는 마치 축제와 비슷한 기간이어서 이 날 가족들은 외식을 나가고 거리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장난감 등의 선물을 줍니다. 그래서 이 기간이 모로코의 완구 업계에게는 대목 기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쉬아파들에게 이 날은 모세나 무함마드의 전통보다는 후세인의 죽음을 기리는 날이지요. 

 이슬람의 순니 - 쉬아 분열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가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가를 두고 벌어진 정치적 갈등에서 기인했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원로들의 회의에 따라 선출된 칼리프들(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쓰만)과 그 전통(순나, sunnah)를 인정하는 세력이 순니파로 발전하고, 예언자의 친척이자 사위인 알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알리의 지지자들, 쉬아투 알리Shiatu Ali)이 쉬아파로 발전하죠. 알리가 결국 네번째 정통 칼리프로 인정받습니다만 그는 시리아에 기반을 둔 우쓰만 일족의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고, 결국 알리가 암살당한 이후 이슬람 세계는 무아위야가 세운 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게 됩니다. 쉬아파 세력은 이에 대해 반대했지요.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직을 승계하면서 이라크 쿠파를 중심으로 하던 쉬아파 세력은 메디나에 머무르던 후세인을 초청, 대놓고 세습을 시작한 우마이야 왕조에 맞설 것을 촉구합니다. 후세인은 72여명으로 구성된 친척들과 지지자들을 데리고 쿠파로 향합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야지드와 이라크 총독 우바이둘라 븐 지야드(Ubaydullah ibn Ziyad)는 쿠파의 반기를 눈치채고 쿠파 내의 반란 세력을 토벌합니다. 후세인이 이라크에 들어왔을때는 기대하던 쿠파의 쉬아파 세력 대신 지야드가 파견한 4,000여 명의 우마이야 왕조 군대와 맞서야 했죠. 
 
 
<카르발라에 있는 이맘 후세인의 묘
근데 이슬람 세계에는 후세인의 묘가 카르발라 뿐만 아니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이집트의 카이로에도 있습니다>


 680년 10월 2일(무하람 2일), 후세인 군대(?)는 지금의 이라크의 카르발라 지역에 캠프를 칩니다. 그리고 이 캠프를 우마이야 군대가 포위하죠. 양측 사이에 협상이 잠시 진행되었으나 곧 결렬되고 후세인 세력은 하나 둘 씩 우마이야 군대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결국 10월 10일(무하람 10일), 후세인이 우마이야 군대에 의해 사망합니다. 그의 머리는 시체에서 베어져 다마스쿠스로 보내집니다. 

 680년 카르발라 사건으로 쉬아파는 정치적 반대 세력에서 4대 칼리프이자 1대 이맘인 알리부터 시작되는 그 후손들로 이어지는 이맘에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종교 세력으로 탈바꿈합니다. 더 이상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현실 권력에 맞서 싸우는 대신 종교, 영적인 영역으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처음 후세인을 초청했으나 결국 그를 돕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둔 쿠파의 쉬아파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의식이 시작됩니다. 후세인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를 돕지 못한 죄를 참회하는 쉬아파의 아슈라가 시작됩니다. 

 
<카르발라 전투를 묘사하는 대형 커튼(parde dari)>

덧글

  • 2014/06/30 21:2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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